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죽기로 싸우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 사흘 동안 회령포에 머무르면서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8월 20일에 그보다 조금 더 큰 이진포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수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칠천량에서 겪은 패배로 장졸[* 장졸이라고 하지만 패잔병과 노병이 대부분이었다.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따르던 정예 수군들은 이순신이 재부임했을 당시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일본군의 대함대가 임박했다는 공포가 군사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순신의 묘사에 따르면 경상 우수사 [[배설(조선)|배설]]이 교서에 절하기를 거부하는 등 공공연히 조정과 전쟁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배설의 행동을 봤을 때 [[PTSD]]가 아니냐는 주장도 있으며, 배설의 이후 수상한 행적과 연관하여 이때부터 배설이 다른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사람됨이 미덥지 못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만호나 하면 딱일 인간이 우수사라는 과분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김응남과의 연줄 때문이다"라고 깠다.] 설상가상으로 이순신 본인도 21일부터 토사곽란으로 사흘 내내 몸져누워 있었다.[* 특히 이순신은 만성 [[위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음 날에는 어란진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해서 군율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 >『정유일기』 8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 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 >『정유일기』 8월 28일. 28일에 어란진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작 수색대 8척이었지만, 조선 수군은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어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수색대를 물리친 후[* 이때의 교전을 어란포 해전이라고 부르는데, 백의종군 후 이순신의 첫 번째 승전이었다.] 이순신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마침내 고위 지휘관인 경상 우수사 배설이 도주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순신은 이전부터 배설을 탐탁치 않게 보았으므로 단지 "배설이 달아났다."라고만 담담하게 적었다.[* 배설은 결국 선조 32년(1599)에 선산에서 잡혀 효수되었다. 별다른 말 없이 한 줄만 쓰여져 있어서 평소 이순신은 배설을 준수하게 평가했고 도망간 데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전부터 배설에 대해 이순신이 안 좋게 봤던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명량 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하는 데에도 미적거려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가 괘씸하다고 적었다. [[김훈(소설가)|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도 이 묘사가 나온다.] 이렇게 이순신이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 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자신감으로 이번 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의 승기를 잡자는 생각이었다. 일본 수군은 9월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9월 7일에 어란진으로 들어와서 벽파진의 이순신과 대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를 조롱하듯 처음에는 배 13척만 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는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한 번도 격침된 적이 없지만 수전에서 이토록 일본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 거의 최초임을 감안하면 일본군은 한 척의 대장선을 상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낙관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기함인 아타케부네([[안택선]])와 크기가 비슷했는데, 일본 수군은 아타케부네를 해상의 성(海上之城)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대한 배라고 인식했다. 주 전투함인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의 반 정도 크기였다.] 배설이 도주한 이후의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9월 3일 신묘, 비오다. > >9월 4일 임진, 북풍이 세게 불다. > >9월 5일 계사, 북풍이 세게 불다. > >9월 6일 갑오,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 >9월 7일 을미,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 군관 임준영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진에 들어왔다고 보고. 미리 경계하고 있다가 신시(申時)에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구축, 이후로도 야습을 경계하다가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뭇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 > >9월 8일 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다.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 > >9월 9일 정유, 맑다. >적선 두 척이 아군을 정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추격하나 놓침. > >9월 10일 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남. >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오다. > >9월 12일 경자, 비가 내리다. > >9월 13일 신축,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즉 맑은 날에는 계속해서 일본 수군이 시비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14일에는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일본군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진에 입항했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의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인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오익창의 사호집에 의하면 이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 탄환은 이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보통 전투직전에 배에 물을 뿌려 혹시 있을지 모르는 화공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면 솜이불에 물을 먹여 걸어둔 것도 화공 대비책일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다만, 굳이 배에 물을 뿌리는게 아니라 솜이불을 두른걸 고려하면 현재 가용 가능한 전선 전부를 가지고 온 것이기에 혹여나 조총사격 등으로 배가 파손될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기 위해 내구도를 보강하려는 목적을 겸했을 가능성이 높다. 육상전으로 치자면 탱크에 임시로 장갑을 보강하는 것과 비슷한 목적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셈. 다만 이 기록 자체가 사실확인이 힘든 면이 있어서 100% 신뢰해선 안되는 기록이다. 그런데 대장선 혼자서 장시간 전투를 치뤘다는것 또한 사실이니 처음부터 무쌍을 고려한 조치였을지도...]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이 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 해남의 전라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오자병법|병법]]에 이르기를 [[필사즉생행생즉사|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 >『정유일기』 9월 15일[* 이순신이 병법에서 인용한 말은 모두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지만 오자에 나오는 경구와 이순신의 인용문은 차이가 있다. 오자병법의 원문은 치병(治兵)편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기를 바라면 죽는다(必死則生 幸生則死)'와 여사(勵士)편의 '한 사람이 목숨을 걸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 이날 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과 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방송했던 한국사전에서는 밤에 이상한 징조도 많았다고 언급했다. 정말로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이순신도 꿈속에서까지 승리를 바랄 정도로 긴장감을 느꼈다고 봄이 적절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